평양 미대 출신의 탈북자 정준홍 씨가 흥미로운 증언을 했다. 같은 미대 여학생이 '구내 식권'을 위조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에 있을 당시 실제로 위조 식권을 본 적이 있는데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그렸다'고 기억했다.
식권 위조는 북한의 미대생, 김영희 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수출입 직종에 근무했다. 하지만 당의 계속된 감시로 사정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미대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당 간부와 친분이 많은 아버지 덕에 편하게 지냈는데 횡령혐의로 상황이 역전되어버렸다. 조사과정에서 사실이 아니었다고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은 개인 재산의 확대를 경계하는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혐의를 덮어씌워버렸다.
지원이 끊긴 김 씨는 당장 미술 재료부터 걱정해야 했다. 엘리트로 살아가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김 씨 자신조차도 앞길이 막막해져버렸다. 며칠 동안 '미대를 관둬야하나'라는 생각에 친구들과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계속된 고민을 하던 김 씨의 생각에 문득 자신의 재능이 떠올랐다. 2년간 힘들게 배운 미술, 그녀의 뇌리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가지고 있던 종이에 정성스럽게 글자를 그렸다. 그녀가 모방하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기숙사 식권이였다. 적발되면 퇴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술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김 씨는 자신의 재능과 이기심을 맞바꾸기로 결정했다.
북한의 경우 인쇄 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잉크의 양도 적기 때문에 구내 식권 또한 별다른 색상 없이 대부분 검은색이다. 따라서 위조가 크게 어렵지 않고 미술을 전공한 학생이면 북한의 서체 등에 더욱 익숙하기 때문에 종이만 있다면 똑같이 모방할 수 있다.
이렇게 기숙사식권으로 시작한 위조는 수요층이 생기면서 여행증명서, 도장이 새겨진 회사 계약서, 나중엔 수출입 문서 위조로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벌어들인 돈으로 평소 갖고 싶었던 이젤, 캔버스, 물감 등을 구입했다. 워낙 잘 살던 집 딸이라 주변에서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보안부가 들이닥쳤다. 그녀의 사물함에서는 위탁받은 중요서류들이 발견됐는데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안이 담긴 위조가 들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게 됐다. 정준홍 씨는 김영희 씨의 지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위조를 한 범죄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북한이라는 국가가 한 여성대학생의 삶과 꿈, 열정을 무참히 짓밟은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사실이 아닌 횡렴혐의만 씌우지 않았어도 지금쯤 만수대 창작사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을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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