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11월호 월간 북한 기고글] 북한의 시장과 절반주의(2016년)

한반도가 절반으로 갈린 지 어느덧 71년이 지났다. 그간 남북한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각종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면서 언어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점 외에 모든 것이 변했다.
 
과거부터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북한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유일지도체제의 견고함으로 내부 분열을 막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숙청과 총살을 당했다. 수직적인 사회 구조는 북한 주민에게 권력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줬다.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보여주듯, 전 인민은 오직 김 씨 일가와 북한 정권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반면 남한은 각기 다른 시각차로 좌-우로 갈렸다. 통합에는 실패했지만 개개인의 다양한 목소리가 대립해가면서 많은 사회 문제들이 공론화 됐다. 이러한 수평적인 갈등은 사회 발전을 가속화 시켰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 88올림픽 이 후 시민 의식의 성숙, 최근에는 김영란 법으로 정치적인 도약까지 이뤄냈다.
 
남한은 탄탄한 기반 위에서 해마다 성장을 거듭했지만 북한은 94년 고난의 행군 이 후 후퇴를 거듭했다. 배급제가 붕괴됐고 주민 간 감시와 처벌 시스템이 무너졌으며 300만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의 체제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과 주민 사이에 갈등의 조짐도 보였다. 북한 주민은 정권에 충성한 대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이 주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자 정권에 대한 충성심은 자연스럽게 물질 가치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곳곳에 시장이 생겼다. 배급제 붕괴로 북한 정권은 시장 통제에 대한 명분을 잃었다. 시장은 점차 규모를 확대해갔다. 초기 시장은 가난을 사고 팔았다. 입던 신발과 옷, 솜이불 등이 시장에서 거래됐다.
 
그러던 북한 시장은 중국과의 밀수 연계로 크기를 키웠다. 다양한 중국 공산품이 시장에 뿌려졌다. 이 과정에 북-중 밀수는 조직적으로 변했다. 시장을 통해 큰돈을 만지는 돈주가 탄생했다. 북한 주민들은 정권보다 돈주를 더 신뢰했다. 시장의 크기에 비례해 정권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다.
 
순간일 것 같던 고난은 20여년이 넘게 지속됐다. 6070 세대 중 70년대 북한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생겼고 2030의 젊은 세대는 북한 체제의 실패를 은연 중 인정했다. 이 같은 입소문은 시장에서 급속하게 퍼져갔다.
밀수꾼들이 시장에 물건을 공급하면서 2000년대부터 북한 시장에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절반주의다. 절반주의는 밀수꾼과 국경 경비대원 사이에서 밀수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이윤의 50%를 주고받는 것을 의미한다. 해당 용어가 생기기 시작한 즈음 절반주의는 단순히 밀수꾼과 경비대원의 갈등만을 의미했지만 현재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정권과 시장 혹은 정권과 개인의 갈등 또한 절반주의라고 말한다. 절반주의는 북한의 사회 구조가 깨지면서 생긴 용어다. 위에서 말한 정권과 시장의 관계가 그렇고 지금부터 설명하게 될 세대 간 절반주의가 그렇다.
 
북한의 6070 세대는 70년대를 관통한 세대다. 70년대는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에 한 발 앞서 있었다. 때문에 6070 세대는 지금까지도 70년대 향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북한 정권의 세뇌의 틀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세대이기도 하다. 반면, 장마당 세대라 불리는 2030 세대는 남한 드라마를 보고 자랐다. 덕분에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체제의 실패를 고스란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 세대가 느끼는 동시대의 평가는 양극단에 있다. 6070 세대는 기존의 북한 구조에 익숙해서 2030 세대의 개방적인 마인드에 손가락질 하고 김정은에 대한 비난을 내면화시킨다. 반대로 2030 세대는 6070 세대를 구태로 평가하고 시대가 변했음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소위 꼰대라고 생각한다. 세대 간 절반주의는 북한을 겪어본 세대와 앞으로 겪게 될 세대의 충돌이다.
 
남녀 간에도 절반주의가 있다. 북한은 여전히 남성의 지위가 여성보다 높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경직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탓에 북한 여성은 늘 순종적이고 수동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시장의 등장은 북한의 오래된 관습을 한 순간 바꿔 놨다. 남녀의 역할과 지위가 불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변했다. 여성들이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장사를 할 수 있는 드센 여성이 새로운 여성상으로 떠올랐다.
 
유리천장 속에 갇혀있던 북한 여성들이 틀을 깨고 시장에 나선 뒤부터 북한 여성들은 경제력이 없는 남성을 자물쇠로 비유했다. ‘하루 종일 집만 지킨다는 냉소적 표현이다. 과거 남성의 일방적인 가부장적 구조는 시장을 통해 남-녀의 경제적인 수평 구조로 바뀌었다. 일례로 남녀 간 겸상을 어색해하던 과거 북한의 모습과 달리 북한 여성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반면 북한 남성들은 여전히 남성의 권위만을 내세우며 신여성의 모습에 혀를 차고 있다. 남녀의 절반주의는 남성 위주의 낡은 관습과 여성의 합당한 권리 요구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권의 방침 또한 절반주의의 대표적 사례다.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서 정권의 방침 중 절반만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년사를 비롯한 정권의 지시 혹은 교시 등의 방침이 내려올 때 마다 북한 정권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고난의 행군 때처럼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북한 주민은 고난의 행군을 통해 사회주의의 실패를 온 몸으로 느꼈다. 길 위에 시체가 널 부러져 있는 모습을 봤고 자고 일어나면 이웃이 죽어 갔다. 그럼에도 김정일은 주민 희생을 강요하며 고난의 행군이라는 당적 구호만 내세웠다.
 
북한은 그 해 신년사에서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은 사회주의 3대 진지를 튼튼히 다지며 백두밀림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싸워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김정일은 주민의 사회적 이탈을 막기 위해 더 큰 충성을 요구했다.
 
단순 구호와 충성 요구뿐이던 고난의 행군에서 순진하게 정권의 지침을 믿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아사했다. 이 후로 북한 주민은 정권의 방침을 따르는 사람을 두고 ‘49호 환자라고 말한다. 49호는 평양에 위치한 정신병원이다. 요코다 메구미가 갇혀있던 곳으로 알려지면서 주목을 끈 바 있다. 49호 환자라고 하는 것은 정신병자라는 의미다. 북한 주민들은 정권의 지침을 정신병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나마 절반이라도 믿어야 하는 것은 해당 시스템 속에서 살아야 하는 북한 주민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정권 방침에 대한 절반주의는 결국 정권과 주민의 지속적인 갈등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주민 뿐 아니라 북한 내 권력층에도 절반주의가 존재한다. 김정일의 권력이 김정은에게 세습되면서 권력층에도 분열이 생겼다. 갑작스럽고 불안정한 권력 세습이 김정은의 지위를 약화 시켰다. 북한 주민조차 김정은을 꼬마 장군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권력층도 마찬가지였다. 장성택은 김정은 뒤에서 짝다리로 서 있었고 김양건은 김정은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심지어 현영철은 김정은 주재로 열린 인민군훈련일꾼대회에서 눈을 감고 졸았다. 김정은은 자신과 관련된 권력층의 분열을 공포정치로 타개했다. 위에 말한 인물은 모두 김정은의 지시로 처형당했다.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오히려 권력층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측근 세력의 탈북 행렬을 봐도 그렇다. 일례로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의 탈북을 들 수 있다. 그는 영국에서 북한 정권의 외화 벌이, 통치 자금 관리, 사치품 공급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태영호 공사의 탈북은 북한 체제에 심각한 내상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북한 정권의 도발과 반인륜적 통치가 종식될 수 있도록 북한 주민 여러분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여러분 모두 인간의 존엄을 존중받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며칠 뒤 베이징 주재 북한 간부 탈북설이 새롭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은 세력과 반 김정은 세력의 갈등으로 표현되는 권력층의 절반주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박 대통령의 탈북 권유와 맞물려 앞으로도 북한 고위층 탈북이 잇따를 것이다.
 
북한 내부 뿐 아니라 탈북자에게도 절반주의가 있다. 탈북자는 북한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통해 탈북을 감행한다. 그들의 절반주의는 강의 절반이다. 도강 시 강의 절반을 넘어야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실제로 절반을 넘어서면 북한의 국경경비대는 탈북자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할 수 없다. -중 국경 경계지역이라 국가 간 도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탈북자의 도강 거리를 평균내면 48m. 탈북자들은 강의 절반을 자유와 억압의 경계로 본다. 대다수의 탈북자는 탈북을 감행한 후 불과 50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 내에서 자유를 억압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이렇듯 강의 절반주의는 개인의 마음 변화를 대변한다.
 
탈북자와 관련된 절반주의 사례는 한 가지 더 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가 브로커를 통해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돈을 송금할 때 정확히 절반을 커버비로 지급한다. 커버비는 안전한 송금을 보장하는 대가다. 전체 송금액 중 20%는 브로커에게, 30%는 국경경비대에게 지급해야 비로소 북한 가족에게 돈이 전달된다. 과거에는 각각 10%, 20%에 불과했지만 대북제재 이후 국경 경비 강화 지시로 절반 이상 커버비를 지급해야 안전한 송금이 이루어진다.
 
한편, 탈북자가 도강을 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시장경제체제와 계획경제체제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북한의 밀수꾼들이 시장경제체제에서 만들어진 생산품을 계획경제체제로 실어 나르면서 북한 내부의 시장화를 이끌고 있다. 균열이 일어난 북한 계획경제체제의 틈을 시장이 파고든 것이다. 초기에는 공산품이 대부분이었지만 2000년대 이 후부터 문화가 거래됐다. 한류가 대표적이다.
 
한류는 북한 주민들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꿨다. 북한 내 한류의 역할을 꼽아보면 남한에 대한 북한의 흑색선전에 의문을 갖게 했고, 남녀의 인식 차이를 좁혔으며, 젊은 세대의 문화적 트렌드를 이끌었다. 북한에서 말하는 절반주의의 시작은 사실 한류였다. 북한 밀수꾼들이 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남한 문화를 수입하면서 국경경비대에게 이윤의 50%를 준 것이 절반주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절반주의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절반주의라는 용어는 갈등과 대립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대부분 고착화된 구시대의 악습과 새롭게 등장한 사회 구조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북한 정권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국경지대에 철조망을 강화하고 전파 탐지기를 통해 해외 연락선을 차단하는가 하면 강력한 시장 통제로 주민들의 생활을 옥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통제가 심해질수록 북한 주민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시스템을 거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북한 주민이 수동적으로 통제를 받아들이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북한 정권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그 중심에 시장과 절반주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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