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연차와 관계없이 대다수의 탈북민이 아직 남한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음을 느낄 때가 있다.
그들은 말한다. "북에 두고 온 것이 많아서 남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처럼 완벽하게 정착하고 산다는 것은 힘들다."고.
탈북민이 北에 두고 온 것, '저마다의 사연'
2009년 탈북한 최영환(24세)씨는 '약속'을 두고 왔다. 2008년부터 북한의 사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더 이상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최 씨는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가져 오겠다'며 중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중국에서조차 공안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아야 했고 결국 너무 힘이 들었던 최씨는 2009년 남한행을 택했다. 그녀는 지금도 어머니를 속인 죄책감으로 산다. "지금도 자신을 걱정하며 하루에 한 번씩 대문 밖을 서성일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요"라고 덧붙였다.
2010년 탈북한 오영신(28세)씨는 부모님에게 '남조선을 가겠다'며 입국한 케이스다. 비록 탈북과정은 힘들지만 남한으로 가서 열심히 일을 하면 북한으로 송금을 해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실제로 몇 번에 걸쳐 부모님에게 돈을 보내줬다. 그 이후로도 1년간 차곡차곡 돈을 모아온 오 씨는 “북한에 송금을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남한으로 모셔와 전국을 여행하는 것이 꿈”이다. 그러기위해서 최선을 다해 돈을 모아야 한다고 덧붙인 그는 3년 후 부모님을 탈북 시킬 계획이다.
오 씨는 북한에 ‘삶에 대한 태도’를 두고 왔다. 그는 “북한에서는 무언가를 할 때, '이것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가?' 보다 '잃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했어요. 남한에 입국하고 나서부터 바뀌었죠. 북한에서는 최악을 먼저 생각했다면 이제는 최선을 먼저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2011년 탈북한 고재근(37세) 씨는 '원망'을 두고 왔다. 그는 고난의 행군과 배급제 붕괴를 겪으면서 가족을 모두 잃었다. 고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쌀 한 톨 주지 못하는 북한 정권에 대해 깊은 원망과 불신이 생겼다고 했다. 탈북을 결심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고 씨는 자신의 가족은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정치적 타살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북한인권'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고 씨는 이제 북한이 원망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북한은 원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북한 인권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이면서 북한을 반드시 국제 사회의 심판대에 올리려고 합니다. 이제는 저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큽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2007년 탈북한 신오훈(35세)씨는 '추억'을 두고 왔다. '부모님과의 추억', '친구들과의 추억', '고향에 대한 추억'…. 수많은 추억들을 북한에 두고 온 그는 그 모든 게 너무 그립다. 신 씨는 “남한에서 친구들끼리 모여 술 한잔하면서 마음을 터놓는 것을 보면 주위 사람 모두 남한에서 함께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자주 합니다”고 말했다. 그런 점을 보면 부모님과 함께 있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남한 사람들이 너무도 부럽다고 한다.
탈북민은 모두 한결같이 "통일이 되면 저마다 북한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은 놓고 왔을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가져온 것은 있다"고 했다. '통일에 대한 믿음'이다. 탈북민들은 탈북을 결심한 순간부터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통일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덕분에 하루하루를 견디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날이 멀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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